교육/역사 (26) 썸네일형 리스트형 가족 사랑의 도시 부여(1)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그리움, 왕흥사 가족 사랑의 도시 부여(1)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그리움, 왕흥사 백제의 부여하면 맨 처음 떠오르는 곳이 낙화암이다. 백마강의 아름다움에 백제 멸망의 아픔이 더해져 더 아름다운 것일까? 낙화암에 올라 백마강을 바라볼 때 건너편에 절터가 하나 있는데 이곳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와 에 의하면 백제 법왕 때 창건하고 무왕 때 완공했다고 하는 왕흥사 터가 있다. 몇 년 전 이곳 절터에서 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목탑 자리에서 발견된 이 유물 가운데 하나가 부처님의 사리를 담은 사리함이었다. 사리함 표면에는 이런 글도 새겨져 있었다.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은 죽은 왕자를 위하여 입찰(立刹, 탑을 세움)하였다. 본래 사리가 2매였는데 사리를 안치 할 때 신령스러운 조화에 의해 3매로 변했다” 정유.. 대통사의 비밀(2), 요지경 속 대통사 대통사의 비밀(2), 요지경 속 대통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도 한발자국 더 들여다보면 말도 안 되는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에 의하면 대통 원년(527) 신라 법흥왕이 웅진에 양나라 무제를 위해서 대통사를 창건했다고 나와 있다. 법흥왕이 이차돈과 함께 신라에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을 칭찬한 것 까지는 좋은데 웅진에 대통사까지 창건했다고 덧붙인 것이다. 그런데 웅진은 당시 백제의 도읍이었기 때문에 법흥왕이 이곳에 절을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일연도 자기가 써놓고 이상했던지 자기의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였다. 그런데 전혀 핀트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일연은 말하기를 당시 웅진은 신라 땅이 맞지만 527년은 이차돈이 순교하는 등 복잡한 시기라 같은 해인 527년 웅진에 대통사를 세울 겨..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가섭사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가섭사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 1박 2일 충주, 음성, 진천 등지를 답사했다. 가섭사는 충북 음성의 진산인 가섭산(710m)의 8부 능선 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절로 조선시대에는 이 산에 서가섭사란 절이 있었다고 한다. 가섭산 봉수대를 폐지하고 군인들이 살던 집을 1900년에 절로 고쳐지었다고 한다. 서가섭사 이래 아미타불에 대한 영험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 전각의 이름도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보전이다. 가섭산 또는 가섭사란 이름이 지어진 배경은 확실치 않으나 가섭은 불교와 인연을 많이 갖고 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고 과거 7불 가운데 한 분의 명호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제자인 마하가섭은 소위 ‘염화미소’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으며 계족산에 .. 단군, 텡그리? 땅임금? 단군, 텡그리? 땅임금? 단군왕검은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임금이란 말로 제정일치를 나타내는 칭호라고 알려져 왔다. 단군의 의미에 대해선 시라토리[白鳥庫吉]와 최남선이 天子의 뜻인 몽고어 Tengri로 규정한 이래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달리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그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을 다를 수 있지만 - 나는 5세기 평양천도 이후로 본다 - 단군신화가 불교식으로 재편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환인 - 환웅 - 단군으로 이어지는 계보도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인에 대해 일연은 제석이라고 주를 달았는데 제석은 석제환인이라고도 하며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의 주인을 말한다. 도리천의 주인을 도리천, 도리천주, 제석, 제석천왕 등으로 부른다. 태백산 신시에 내려 온 환.. 백제 승려 관륵, 일본불교의 계율을 정비하다! 백제 승려 관륵, 일본불교의 계율을 정비하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에 근거해 백제의 불교 수용연대를 4세기 침류왕 때로 보지 않고 6세기로 늦춰보고 있다. 에 엄연히 384년 침류왕 원년 동진의 마라난타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써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불신론과 맞물려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근거로 드는 기록은 624년의 기록이다. 한 승려가 할아버지를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일본 천황이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승려 통제에 들어갔다. 이때 백제 출신의 승려 관륵은 아직 일본에 계율이 정립되지 않아 생긴 일이라고 변명하고 일본의 승관제도를 확립시킬 것을 제안하는 글을 천황에게 올렸다. 그 글 가운데 다음 구절이 백제 불교 수용에 관한 논란을 야기 시켰다. “대저 佛法은 西國으로부터 漢에 이르러.. 대통사의 비밀? 대통사의 비밀? 서로 가까워지는 비결은 간단하다. 둘만의 비밀을 만드는 것이다. 는 신라 법흥왕이 대통 원년(527) 양나라 황제 무제를 위해서 웅진[공주]에 절을 지었다고 하였다. 일단 이 기록은 527년 당시 웅진이 백제의 수도였으므로 성립되기 어려운 말이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법흥왕을 백제의 성왕으로 바꾸어 이해하고 있다. 물론 백제 성왕이 527년 양나라 무제를 위해서 웅진에 절을 지었다는 것은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후 대통사는 백제가 정신적으로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찰로 각인되어 왔다. 마치 서울 한복판에 미국 힐러리를 위한 교회를 세워 주었다면 후대의 역사가가 21세기 한국사를 연구할 때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처럼. 대통은 양나라 무제가 527년 .. 삼국유사는 몽골에 저항하기 위해 찬술되었는가? 삼국유사는 몽골에 저항하기 위해 찬술되었는가? “흉포한 몽고를 상대로 한 30년 민족의 대항전 속에서, 이민족의 압제라는 현실의 제약 하에서”((상)(1976, 창작과 비평사, 135쪽)“외세의 압력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사관을 강하게 반영하는 사서”((상), 1994, 창작과 비평사. 83쪽) 위 두 책은 현재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널리 읽힌 책이다. 이 책에선 일연이 편찬한 의 역사인식을 몽골에 저항하기 위한 민족정신의 고취였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도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러한 입장에 있다. 그러나 정작 삼국유사에는 몽골[원]에 대한 저항을 나타내는 구절은 찾아지지 않는다. 황룡사 9층탑이 불탄 것에 대해서도 몽골이란 국호를 드러내지 않고 ‘서산병화西山兵火’라고 완곡하게..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의 가람배치와 조형원리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의 가람배치와 조형원리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의 가람배치와 조형원리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석불사)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각각 창건했다는 사실은 다 알려진 것.그렇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의 상징성? 내지는 조형의 원리, 아니 사상적 배경은 어떤 것일까. 지금까지 수많은 얘기들이 나왔다.그런 얘기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좀 그렇고..일단 결론부터 말한다면, 석굴암은 영산회상을 재현한 것이다. 이는 일단 석굴암의 위치를 고려해야 한다. 토함산은 동악이라고도 불린다.공교롭게도 인도 왕사성의 영취산이 바로 왕사성의 동쪽에 있다는 것.뭐 이런거 가지고 단정을 짓느냐고 하겠지만....밑도 끝도 없이 결론을 내리자면 석굴암은 영산회상을 재현한 것. ..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