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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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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설의 함정(3마지막회) 대가의 견해라도 항상 비판적 관점을 견지해야 통설의 함정(3마지막회) 대가의 견해라도 항상 비판적 관점을 견지해야 스에마쓰는 에 나와 있는 백제의 불교수용연대로 믿지 않았다. 에 나오는 관륵기사를 근거로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년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라 5~6세기에 받아들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국내학계에서는 별다른 대응논리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난 이 문제를 관륵기사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함으로서 이를 논박하였다. 이에 대해선 앞선 페북 글에서 다룬 바가 있어서 여기선 생략하기로 한다. 스에마쓰가 의 528년설을 부정한 것은 그가 법흥왕 때의 기사와
통설의 함정(2) 어떻게 527년이 정설이 되었나? 통설의 함정(2) 어떻게 527년이 정설이 되었나? 현재 유통되고 있는 한국고대사 연표는 에 근거하고 있다. 다만 2가지 경우만 예외다. 하나는 광개토왕의 즉위연대다 에 392년 즉위라고 되어 있지만 에 근거해 391년을 광개토왕의 즉위연대로 바로 잡고 있다. 또 하나는 이차돈의 순교연대이다. 에 528년으로 나와 있지만 대부분의 연표가 의 527년 설을 따르고 있다. 1년 차이에 불과한 지엽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바로 잡을 건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차돈의 순교에 대해선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이차돈의 순교연대에 대해선 이렇다 할 연구가 없었다. 이차돈의 순교연대에 대해선 삼국유사에 527년, 삼국사기에 528년, 해동고승전에 529년으로 저마다 다른 연대..
통설의 함정(1) 오늘 8월 5일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통설의 함정(1) 오늘 8월 5일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역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외울게 많다는 거다. 특히 연도를 외우는 게 그렇다. 하지만 역사가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니 따로 연도를 외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난 연도를 외우는 방법의 하나로 비밀번호나 전화번호를 권하고 있다. 사람마다 적어도 10여개의 비밀번호를 갖고 있는데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이나 인물의 연도를 섞어서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나의 전호번호 끝 4자리는 1206인데 바로 일연이 태어난 해이다. 1206을 알면 의 찬술연대가 13세기이고, 몽골의 침략 연대가 13세기이고, 팔만대장경의 조판 연대가 13세기임을 힘들이지 않고 알 수 있다. ​ 오늘은 외우기 힘든 연도 가운데 하나인 고려..
문화재티(4) 요동성 고려 성왕 광개토왕, 가장 오랜 탑을 세우다 문화재티(4) 요동성 고려 성왕 광개토왕, 가장 오랜 탑을 세우다 이번 문화재티는 요동성을 소재로 했다. ‘요동성육왕탑’조에 의하면 고려 성왕이 인도의 육왕(아육왕, 아쇼카왕)이 요동에 세웠던 탑을 이어받아 고려 성왕이 요동성에 다시 7층탑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의 고려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구려다. 고구려가 4~5세기 나라이름을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꾸었기 때문에 에서는 전체 고구려를 지칭할 때 대부분 고려라고 하고 있다. 여기의 성왕은 불교의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을 말하며 대표적인 전륜성왕은 인도의 아쇼카왕이다. 사람들은 고려 성왕을 동명성제[동명성왕]이라고 하지만 이때는 아직 고려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라 말이 안된다고 일연은 비판하고 있다. 고려 성왕을 고국양왕으로 보기도 하지만 ..
가족 사랑의 도시 부여(5)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드리는 선물, 자기사 목간 가족 사랑의 도시 부여(5)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드리는 선물, 자기사 목간 역사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국 고대의 역사를 알기위해서 와 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위 두 책은 12세기와 13세기에 찬술되어 기원 전후부터 7세기에 걸치는 삼국 당대의 역사를 얼마만큼 잘 전하고 있는지는 항상 의문으로 남아있다. 이런 의문이 남는 후대의 기록을 보완해 주는 것이 당대인들이 남긴 문자자료이다. 대표적인 것인 돌에 새긴 금석문이지만 실용적인 필요성에서 더 많이 사용했던 것이 나무에 글을 남긴 목간이다. 근래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세운 능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많은 목간들이 발견되었다. 이들 목간들은 주로 성왕과 창왕[위덕왕]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목간에는 “숙세결업 동생일처 宿世結業 同生一處, 곧 오..
가족 사랑의 도시 부여(4)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정지원 이름이 새겨진 불상 가족 사랑의 도시 부여(4)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정지원 이름이 새겨진 불상 부소산성에는 여러 사연 있는 곳들이 많다. 부소산성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낙화암에 오르면 백마강 너머 아버지 창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세운 절터가 보인다. 낙화암처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부소산성에 달을 보낸다는 뜻의 송월대(送月臺)란 건물이 있다. 지금은 사비루로 이름이 바뀌었다. 1919년 이곳에서 높이 8.5cm의 한 작은 불상이 출토되었다. 이 불상은 하나의 광배에 부처와 양쪽에 두 보살이 협시하는 1광 3존불의 형태를 띠고 있다. 아쉽게 왼쪽 보살의 상당 부분은 떨어져 나갔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정지원이 죽은 처 조사를 위해서 금상[불상]을 만드노니..
가족 사랑의 도시 부여(3) 아버지를 위한 딸의 기도, 창왕이름이 새겨진 사리감 가족 사랑의 도시 부여(3) 아버지를 위한 딸의 기도, 창왕이름이 새겨진 사리감 백제 금동대향로가 발굴된 능사에서 2년 뒤인 1995년 국보급 유물이 또 발굴되었다. 능사의 목탑지에서 발굴된 창왕명사리감이 바로 그것이다. 창왕은 앞서 언급한 성왕의 아들이고 위덕왕이라고도 한다. 사리감은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한 감실 모양의 사리함이 감실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사리감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중이다. 신라와 달리 백제는 왕실 여성의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왕비는 팔수부인 등 손꼽을 정도다. 공주의 경우는 한명도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창왕명사리감에 백제 공주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바로 매형공주다. 사리감에 쓰여 진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567) 매형공..
가족 사랑의 도시 부여(2) 아들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백제금동대향로 가족 사랑의 도시 부여(2) 아들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백제금동대향로 백제 금동대향로에 대해선 앞선 몇 차례 글을 올렸었다. 용, 연꽃, 산, 5악사, 봉황으로 어우러진 백제 향로를 기승전결의 끊임없는 전변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향로의 역동성을 강조했었다. 중국 향로에서 보이지 않는 5악사를 통해 향로가 백제 것임을 확인했다. 금동대향로의 유불선 삼교에 전통적인 용 신앙이 어우러진 백제 문화의 총체로 해석해 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금동대향로를 만든 목적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백제 성왕은 고려(=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전선을 폈다. 하류는 백제가 차지하고 상류는 신라가 차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신라는 고려와 밀약을 맺고 백제가 회복한 한강 하류지역도 독차지 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