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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랑의 도시 부여(1)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그리움, 왕흥사


백제의 부여하면 맨 처음 떠오르는 곳이 낙화암이다. 백마강의 아름다움에 백제 멸망의 아픔이 더해져 더 아름다운 것일까?

낙화암에 올라 백마강을 바라볼 때 건너편에 절터가 하나 있는데 이곳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법왕 때 창건하고 무왕 때 완공했다고 하는 왕흥사 터가 있다.

몇 년 전 이곳 절터에서 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목탑 자리에서 발견된 이 유물 가운데 하나가 부처님의 사리를 담은 사리함이었다. 사리함 표면에는 이런 글도 새겨져 있었다.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은 죽은 왕자를 위하여 입찰(立刹, 탑을 세움)하였다. 본래 사리가 2매였는데 사리를 안치 할 때 신령스러운 조화에 의해 3매로 변했다”

정유년은 577년으로 백제 창왕[위덕왕] 때다. 백제 위덕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는 내용이다. 부모가 죽으면 땅 속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창왕의 상심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 남는다.

기록에는 왕흥사가 법왕과 무왕 때 창건했다고 했는데 사리함에선 위덕왕 때 창건했다고 해서 학계에선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기록을 믿지 않고 위덕왕 때 창건된 절로 보기도 하지만, 나는 절 이름이 많이 바뀐 사례를 참조하여 창왕 때 창건된 이 절이 법왕 때 중건하면서 왕흥사로 바뀌고 무왕 때 완공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절의 위치이다.

삼국시대 절의 위치는 대부분 평지에 세워지는데 이 절은 백마강 변에 세워졌다. 강변에 세운 한 이유는 부소산성은 세속의 세계인 차안(此岸)이고 백마강 건너편은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을 염두해 두었을 수도 있다. 배를 타고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자체가 경건한 종교적 의례일 수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도 창왕의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부모가 죽으면 날이 감에 따라 잊혀지지만 자식이 죽으면 날이 갈수록 그리움이 더해간다.

아들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 위덕왕은 새벽녘 부소산성에 올라 백마강 건너편 아들을 위해 세운 탑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새벽 물안개가 이리 저리 옮겨갈 때 마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탑의 모습이 마치 창왕이 그토록 애타게 보고 싶었던 아들의 얼굴처럼 보였을 것이다.(조경철, <백제 왕흥사의 창건과정과 미륵사>)

출처 : 나라이름역사연구소 조경철 교수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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