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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랑의 도시 부여(2)
아들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백제금동대향로

백제 금동대향로에 대해선 앞선 몇 차례 글을 올렸었다. 용, 연꽃, 산, 5악사, 봉황으로 어우러진 백제 향로를 기승전결의 끊임없는 전변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향로의 역동성을 강조했었다. 중국 향로에서 보이지 않는 5악사를 통해 향로가 백제 것임을 확인했다. 금동대향로의 유불선 삼교에 전통적인 용 신앙이 어우러진 백제 문화의 총체로 해석해 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금동대향로를 만든 목적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백제 성왕은 고려(=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전선을 폈다. 하류는 백제가 차지하고 상류는 신라가 차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신라는 고려와 밀약을 맺고 백제가 회복한 한강 하류지역도 독차지 하였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다. 백제는 성왕의 아들 창이 앞장서서 충청도 옥천 부근에서 신라를 밀어 붙이고 있었다. 성왕은 날이 한참 더울 음력 6월에 아들 창을 격려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던 중 미리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창도 포위당하였으나 가까스로 도망 나왔다.

성왕은 아들 창의 태어나자 이를 기념하여 웅진에 대통사를 지을 만큼 각별히 아들을 사랑했다. 창도 아버지 성왕의 뜻을 따라 잃어버린 한강유역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신라를 압박하였다. 하지만 결국 신라에 대한 강경노선을 취한 창에 의해 결과적으로 아버지 성왕이 전사하게 되자 그 모든 책임을 창이 떠맡게 되었다.

창은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스님이 되려고도 했다. 다음 왕위를 계승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100명의 승려를 대시신 출가시켜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 창은 아버지의 능 옆에 빈전을 세우고 이곳에서 3년상을 치렀다. 이때 아버지 성왕의 명복과 극락왕생을 위해 만들어진 향로가 백제금동대향로다.

아버지 성왕은 유명을 달리했지만 아버지가 꿈꾸었던 백제를 향로에 재현해 내었다. 빈전은 나중에 성왕과 백제 역대 왕들의 명복을 비는 절로 바뀌었고 향로는 이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중이다.

결코 굴하지 않는 백제의 기상을 지축을 박차고 온 세상을 뿜어내는 용의 기상으로 되살려냈다. 불교와 도교가 어우러진 연꽃과 봉래산을 재현하고 임금과 신하와 백성과 사(事)와 물(物)의 5악의 조화 속에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봉황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제는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이 된 백제금동대향로, 거기에는 아버지 성왕을 그리워하는 아들 창왕의 애틋한 그리움이 배어있다.

출처 : 나라이름역사연구소 조경철 교수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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