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보이는 최초의 유불갈등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해 준 연대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552년이라고 하였고 일본 원흥사에서 전하는 기록에는 538년이라고 하였다.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538년 설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일본서기를 따르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백제 성왕 때 노리사치계를 보내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면서 첨부한 글이 있는데 이것이 당대의 기록이 아니고 8세기 초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임의로 끼워놓은 글이라는 점이다.
첨부한 글은 호국경전인 <<금광명최승왕경>>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 경전은 703년에 번역된 경전이므로 552년 백제에서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금광명최승왕경>>에 나오는 내용에 대해서 국내학자들은 크게 주목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금광명최승왕경>>의 구절 일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원 경전에는 ‘성문과 독각은 능히 이 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는 ‘주공과 공자는 능히 이 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로 되어있다. 성문과 독각이 주공과 공자로 교체된 것이다.
성문과 독각은 소위 소승으로 대승보다 하위에 있는 개념인데 바로 이를 주공과 공자로 교체해서 유교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 찬자는 <<금광명최승왕경>>을 인용하면서 왜 굳이 주공과 공자로 교체했을까?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할 때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주공과 공자로 교체한 장본인은 백제라고 보아야 한다. 당시 백제에는 유학자인 중국 출신의 육후와 인도까지 다녀 온 승려 겸익이 성왕의 통치를 보좌하고 있었다. 육후와 겸익의 대립 결과 불교계가 승리하여 그 결과로 일본에 보낸 글에 주공과 공자를 폄하하는 내용이 실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실린 8세기 번역 <<금광명경최승왕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백제에서 보낼 때 인용한 경전은 5~6세기에 번역된 <<금광명경>> 또는 <<합부금광명경>>이었는데 일본서기 찬자가 백제에서 보낸 주공과 공자는 그대로 살린 채 당시 유행한 <<금광명최승왕경>>으로 바꾸어 기록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백제 성왕 때 말 유불의 갈등은 554년 관산성패전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고 멀리 백제 멸망의 한 원인遠因으로도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출처 : 나라이름역사연구소장 조경철 교수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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