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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 전환의 도시, 공주(1)

패러다임의 전환과 나의 공부(1)

내가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다. 그때는 발표수업인데 난 고려 소수림왕을 발표했었다. 먼 옛날 일이지만 아직도 그 때 발표 때 기억은 생생하다.

공주와의 인연은 고등학교 때다. 한번은 8월 한가위 때 혼자 공주에 갔었다. 예전 공주 박물관에서 누나 또래의 여자를 만났고 내 딴에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나를 잘 보았는지 자기에게 여동생이 있는데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했다. 내가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과학혁명의 구조란 책을 읽을 기회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난 대학도 다른 과는 쳐다보지 않고 오직 사학과였다. 다만 아버님이 농정과 관련 있는 일을 하셨는데 농업이 살아야 우리나라가 산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래서 농업에 관심에 있었고 거기에 들어가서도 농업사를 하려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그런데 대학 면접에서 난 적지 않게 실망했다. 중학교 때부터 꿈꾸어 왔던 역사학에 대한 자부심에 상처를 받았다.

다행히 대학에 들어와 내 인생의 지표가 될 3권의 책을 접한 것은 행운이었다. 첫 번째 책이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였고, 두 번째 책이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었고, 세 번째 책이 최현배의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이었다. 오늘 다룰 책은 첫 번째 책이다.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이지만 80년대 널리 읽혔던 책이다. ‘패러다임’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 용어를 학문적으로 정립한 책이 이 책이다. 나는 이 책을 1학년 때 읽었는데 제목에서 느끼듯 사학과 1학년이 읽기에는 부담이 되는 과학사에 관한 책이었다. 아마 당시 좋아하고 있던 여학생이 자기 대신 숙제를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정독해서 읽지 않았을 책이었다.

책의 내용은 어려웠는데 내 나름대로 생각하기엔 이런 내용이었다. 과학과 학문의 혁명적 발전은 패러다임의 전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존 학문의 틀[패러다임]에 갇히다 보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존 학문은 퍼즐 맞추기에 불과하다. 단지 누구보다 빨리 퍼즐을 맞추었다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책의 핵심 명제를 나는 이렇게 정리해보았다. 전적으로 내 생각일 수도 있지만.
첫째, 과학과 학문의 혁명적 발전은 지식의 축적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과학과 학문의 혁명적 발전은 전공 내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가 배운 것에 갇히게 되고 특히 자기 전공 외에 문제 제기에 대해 귀를 막는다고 한다. 항상 배운 것에 갇히지 않고 전공이 다르더라도 그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지 말라는 말이다.

고등학교까지 열심히 외우고 익혀서 지식을 축적했고 대학교 들어와서도 그렇게 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식이 축적된다고 해서 학문의 발전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하는 그의 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다른 과는 쳐다보지 않고 오직 사학과만 쳐다보고 전공을 열심히 공부해야지 하고 생각했던 나에게 학문의 발전은 전공 내에서 이루어지 않는다고 하는 말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공부도 하지 말고 전공도 하지 말고 어쩌라는 말인지.

다행히 면접 때 실망도 했고 공부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쿤의 말도 있고 해서 가끔은 사회문제도 관심을 가졌지만, 대학 때 열심히 연애만 했다. 물론 후회는 없다. 다시 대학생이 되어도 똑같은 4년을 보내고 싶을 정도로.

난 쿤의 말대로 항상 배우는 지식마다 비판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되도록 이면 상대방의 논리에 쉽게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분위기가 그랬지만 다른 과 전공 수업도 많이 들었다. 경제학, 철학, 사회학 등등. 사람도 가리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논리를 전개하는 사람의 말도 일단 들어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지금도 재야에서 주장하는 논리에 대해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노력도 한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그렇게 내 인생과 학문의 방향을 정해 주었고 나의 얼마 되지 않는 학문적 성과도 알게 모르게 거기에 충실했던 것 같다. 앞으로 다룰 주제 가운데 하나인 대통사도 내 딴에는 백제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하나의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쿤, 당시 읽었던 과학혁명의 구조, 나의 책 <<백제불교사연구>> 서문 가운데 일부


출처 : 나라이름역사연구소장 조경철 교수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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