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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설의 함정(1)
오늘 8월 5일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역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외울게 많다는 거다. 특히 연도를 외우는 게 그렇다. 하지만 역사가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니 따로 연도를 외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난 연도를 외우는 방법의 하나로 비밀번호나 전화번호를 권하고 있다. 사람마다 적어도 10여개의 비밀번호를 갖고 있는데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이나 인물의 연도를 섞어서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나의 전호번호 끝 4자리는 1206인데 바로 일연이 태어난 해이다. 1206을 알면 <<삼국유사>>의 찬술연대가 13세기이고, 몽골의 침략 연대가 13세기이고, 팔만대장경의 조판 연대가 13세기임을 힘들이지 않고 알 수 있다.



오늘은 외우기 힘든 연도 가운데 하나인 고려, 백제, 신라의 불교수용연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고려는 소수림왕 때인 372년, 백제는 침류왕 때인 384년, 신라는 법흥왕 때인 527년이다. 고려와 신라의 불교수용 연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신라는 그렇지 않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불교수용 연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528년이라 하고 <<삼국유사>>는 527년 인데 현재 <<삼국유사>>의 527년을 통설로 인정하고 있다. 한 연구자에 의해 한 견해로 제시했던 527년 설이 이제는 통설을 넘어 진실이 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817년 8월 5일(음력) 이차돈의 기리는 사람들이 그의 무덤에 모여 향을 바치고 예불을 드렸다. 아마도 8월 5일은 이차돈이 순교한 날일 가능성이 높다.

한 외국 스님이 돈을 밝히는 한국 불교를 비판하고 나섰다. 이차돈이 순교한 오늘 8월 5일, 그가 목숨을 내놓고 이 땅에 불교를 뿌리내린 거룩한 뜻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이차돈의 죽음을 말리는 법흥왕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상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다.”
“夫有非常之人 然後有非常之事”

아래 글은 <이차돈의 순교연대에 대한 재검토>에 실은 머리말 부분이다.

역사는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다. 역사적 사건은 녹화될 수가 없으므로 사건이 일어난 뒤 기록으로 남는다. 모든 기록을 남긴다하더라도 그 기록은 선택된 기록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기록은 비판적 검토를 거친 후 이용되어야 한다. 항상 가변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한 남아있는 기록들도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하여 가장 타당한 기록을 잠정적인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잠정적인 역사적 사실이 시간이 지날수록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없지 않다.

신라의 불교 수용 및 공인과 관련하여 이차돈의 순교에 관한 기록도 여러 기록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1950년대 한 일본 학자에 의해 제기된 이차돈의 순교가 527년에 일어났다는 가설도 반세기가 흘러오면서 마치 진실처럼 당연시 여겨져 왔다.

본 글에서는 이차돈의 순교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다시 검토해 보고 527년이 이차돈의 순교연대로 받아들이게 된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더 나아가 이차돈의 순교연대가 527년이 아닌 528년일 가능성이 높음을 검토해 볼 것이다.

경주박물관의 이차돈 순교비(Ⓒ한형기)와 도록스캔

출처 : 나라이름연구소장 조경철 교수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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