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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설의 함정(3마지막회)
대가의 견해라도 항상 비판적 관점을 견지해야

스에마쓰는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백제의 불교수용연대로 믿지 않았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관륵기사를 근거로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년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라 5~6세기에 받아들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국내학계에서는 별다른 대응논리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난 이 문제를 관륵기사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함으로서 이를 논박하였다. 이에 대해선 앞선 페북 글에서 다룬 바가 있어서 여기선 생략하기로 한다.

스에마쓰가 <<삼국사기>>의 528년설을 부정한 것은 그가 <<삼국사기>> 법흥왕 때의 기사와 <<삼국사기> 지리지와의 비교 검토를 통해서 추론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근거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신라 최치원의 쓴 <봉암사지증대사비>이다. 이 비에 대해서는 후술하고 먼저 신라 김대문의 기록을 검토하고자 한다.

신라시대 기록 가운데 이차돈의 순교를 언급하면서 직접적으로 구체적으로 연대를 적시한 것은 김대문의 <<계림잡전>>과 앞서 언급한 최치원의 <지증대사비>다. 김대문은 <<화랑세기>>를 편찬한 것으로 유명한 데 지금 유통되고 있는 <<화랑세기>에 대해선 위서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차돈의 순교를 다르는데 그가 전거로 삼은 것은 김대문의 <<계림잡전>>이다. 따라서 <<삼국사기>>가 1145년 편찬되었지만 이차돈에 관한 기록은 김대문의 <<계림잡전>>을 인용했으므로 신라 때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이차돈의 순교연대를 528년으로 본 것은 바로 <<계림잡전>>의 528년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치원의 <지증대사비>에서 이차돈의 순교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해석의 논란이 있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상략) 時迺梁菩薩帝反同泰一春 我法興王剬律條八載也(하략)”
(상략) 때는 곧 양나라의 보살제가 동태사에 간지 한해 만이요, 우리 법흥왕께서 율령을 마련하신 지 팔년째였다. (하략)

이차돈이 순교한 연대를 양보살제[양무제]가 동태사에서 돌아온 1춘에 해당되는 해이며 법흥왕이 율령이 반포한지 8년 되는 해라는 것이다. 스에마쓰는 <<삼국사기>> 의 528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위 비석을 해석하는 것도 이에 맞추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다.

양무제가 동태사에 사신(捨身)하고[이 문제는 앞서 대통사의 비밀 편 참조] 돌아온 해는 527년이므로 ‘반동태일춘’은 ‘동태사에서 돌아온 1년’으로 해석해서 528년으로 보아야 하는 데 이를 ‘동태사에서 돌아온 그해 봄’으로 해석하여 527년으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한 해는 520년이다. 율령을 반포한 지 8년째이므로 이것도 528년이되어야 하는데 율령을 반포한 연대인 520년까지 포함시켜 이것도 527년으로 해석해 버렸다. 만약 521년을 말할 때 이를 율령을 반포하진 2년째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剬律條八載也反同泰一春’과 ‘法興王剬律條八載也’는 서로 대구가 되는 문장이므로 一春과 八載도 서로 대구로 풀어야 한다. 8재가 8년이므로 1춘도 당연히 1년으로 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이차돈의 순교연대를 전하는 신라의 기록은 모두 528년설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들어와 변화가 생겼다. 신라시대에는 이차돈의 순교를 양무제의 사신과 비교하였다면 선종이 유행한 고려시대에는 이차돈의 순교를 527년 중국에 선종을 전파한 달마의 박해와 연관시키기 시작하였다.

특히 <<삼국유사>>는 세상일은 서로 감음을 받아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면서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던 해에 달마가 중국에 들어왔다고 하여 노골적으로 이차돈과 달마를 연관시켰다. 사실 <<삼국유사>>에서 이차돈의 순교가 527년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은 없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의 생각을 담은 본문과 각주에서만 527년을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차돈 순교 연대는 신라시대에 528년으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고려시대 선종의 보급으로 이차돈의 순교를 중국의 달마와 연관시키면서 527년으로 변화된 것이다.



나는 스에마쓰가 527년을 주장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는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근거를 대고 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문제는 스에마쓰의 견해가 하나의 주장이라는 점을 잊고 마치 그게 정설이라고 50여년이 넘게 그냥 넘어 온 우리의 자세를 비판하고 싶은 것이다. 대가의 주장이라면 그에 대한 비판적 검토 없이 그대로 믿어 온 우리 학계의 반성이 필요할 때다.

지증대사비, 현동태사(Ⓒ권오영), 김명국의 달마도


출처 : 나라이름연구소장 조경철 교수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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