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설의 함정(2) 어떻게 527년이 정설이 되었나?
통설의 함정(2)
어떻게 527년이 정설이 되었나?
현재 유통되고 있는 한국고대사 연표는 <<삼국사기>>에 근거하고 있다. 다만 2가지 경우만 예외다. 하나는 광개토왕의 즉위연대다 <<삼국사기>>에 392년 즉위라고 되어 있지만 <광개토왕릉비>에 근거해 391년을 광개토왕의 즉위연대로 바로 잡고 있다. 또 하나는 이차돈의 순교연대이다. <<삼국사기>>에 528년으로 나와 있지만 대부분의 연표가 <<삼국유사>>의 527년 설을 따르고 있다. 1년 차이에 불과한 지엽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바로 잡을 건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차돈의 순교에 대해선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이차돈의 순교연대에 대해선 이렇다 할 연구가 없었다. 이차돈의 순교연대에 대해선 삼국유사에 527년, 삼국사기에 528년, 해동고승전에 529년으로 저마다 다른 연대를 제시하고 있다.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조의 몇몇 기사를 삼국사기의 직관지 및 지리지와 비교해 보았다. 그는 병부의 설치를 신라본기에는 법흥왕 4년이라고 했는데 직관지에서는 법흥왕 3년이라 했고, 신라본기에는 법흥왕 12년조에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 군주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지리지에서는 법흥왕 11년 처음 군주를 두었다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서로 간에 1년의 차이가 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5년[528]의 이차돈 순교기사도, 다른 지(志)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보이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1년을 앞당겨 법흥왕 14년[527]으로 고쳐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기백, 이병도를 시작으로 지금은 모두 그의 견해를 취하여 삼국유사의 527년 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신라본기 법흥왕조의 기사 모두가 1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스에마쓰도 언급했듯이 신라본기 법흥왕 18년 상대등을 처음 설치했다고 하였는데 직관지에도 법흥왕 18년 상대등을 설치했다고 하였고, 신라본기 법흥왕 19년 금관국 구해왕이 항복했다고 하였는데 지리지에도 법흥왕 19년이라고 했다. 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본기 법흥왕 기사가 다른 지와 일치하는 경우도 많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법흥왕 15년의 이차돈의 순교 기사는 삼국사기의 직관지와 지리지는 물론 다른 곳에서 비교할 수 있는 기사가 없다. 따라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5년(528)을 14년(527)으로 바꾸어 이해하는 스에마쓰의 견해는 보다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스에마쓰에 의해 이차돈의 순교연대가 527년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이차돈의 순교연대에 대해선 527, 528, 529년 등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 그런데 527년은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에 의해 의도적으로 강력히 주장된 견해이기도 했다.
[ 출처 : 나라이름연구소장 조경철 교수님 페이스북 ]